작가는 삶의 목표가 아니라 삶의 방식이라고. 작가라는 타이틀을 다는 것보다 작업이라는 활동을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아무런 결과를 내지 못하는 저를 부단히도 타일러야 했어요.
자연계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약육강식보다는 적자생존이 훨씬 더 적합해요. 약하고 강하고의 문제가 아닌, 적응했느냐 적응하지 못했느냐의 문제입니다.
목표를 달성해도 좋고 달성하지 못해도 좋습니다. 목표를 가짐으로써 작업을 하고 또 의욕을 낼 수 있다면 뭐든 의미가 있는 것이지요.
목표를 인식했고 납득할 정도로 시도했다면 그 자체로 충분합니다.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해서 얻을 이득이래봤자 별거 아닌 우월감이고, 받을 손해를 따져보면 영혼이 무너지는 열등감인데. 고작 주변의 작가 지망생들 사이에서 5분 정도 우월감을 느낄 일말의 가능성을 위해 5개월동안 열등감으로 몸부림칠 위험을 감수한다면 여러모로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도박 아닌가요? (그룹경쟁에 대해)
작가로서 성장하는 과정은 사람에 따라 그 양태가 천차만별입니다.
자기가 만족하고 납득할 순간이 지금 당장이 아니고 아주 먼 순간에 올지 모른다고 해서 아쉬울 필요도 없습니다. 그 순간이 영영 오지 못하더라도 계속해서 노력했던 시간이 즐겁다면 손해를 보는 일도 아니고요.
작업에 대해 알이 못했을 때, 그저 작가가 되고 싶다는 집착만 있던 시절은 그저 괴롭기만 했습니다.
내가 작업을 좋아하고 계속할 방법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이 더 도움이 된다.
재미만 있으면 그만이라는 이야기는 창작의 공정에서의 고민을 뭉개버립니다.
도입부에 독자들이 자연스레 그 세계 안에 녹아들 수 있도록 안내하는 듀토리얼의 역할마저 요구됩니다. 명확하고 또 간결하게 필요한 정보를 전달해야만 하는 것이지요.
개연성을 만드는 것은 논리가 아니라 기세라는 사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기세는 사랑이 결국 승리한다는 개연성은 그 어떤 논리보다도 더 위에 군림합니다.
내용이 형식을 결정하고 형식이 내용을 결정합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을 뿐입니다. 내가 원하는 내용에 어울리는 매체와 그곳의 형식이 어떠한지, 내가 원하는 매체와 그곳의 형식에 어울리는 내용은 어떠한지 이를 고민해보는 것도 좋겠지요.
외부에서의 침입은 두 가지 방향으로 정리되죠. 타인을 내 안에 받아들이거나, 타인 안에 내가 들어가거나. 이는 사랑이기도 하고 식사이기도 하고 침략이기도 합니다.
캐릭터성은 그 인물 한 명에게 온전히 주어지는 것이 아닌, 다른 캐릭터들과의 관계망 속에서 완성이 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내가 이입한 대상이, 나에게 있어 소중한 존재가 부당한 이유에서 회복 불가능한 위협을 당할 때 우리는 더 이입하고 다채로운 감정을 느낍니다. 분노도 나고 공포도 차오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호러에서 다루는 갈등에 있어 당위적인 면, 윤리적인 면을 함께 고민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폭력은 긴장을 부릅니다. 그리고 긴장은 의외로 오래 유지되지 않는 상태입니다. 너무 비정하고 그저 잔인하기만 하면 그 긴장은 풀리고 웃음거리가 되어버립니다. 그 때문에 많은 호러 영화가 군데군데에 코미디를 넣어 긴장을 잠시 풀어주는 것은 차라리 선제적으로 긴정을 풀고 이완을 시켜서 이후 있을 폭력적인 장면의 긴장을 한껏 끌어올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스너프나 포르노 영사처럼 폭력을 반복하기만 해서야 긴장이 유지되지 않으니까요. 따라서 폭력에는 드라마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드라마를 위한 이입이 필요합니다.
인물에게 감정 이입할 장면을 주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으냐. 여러가지 답안이 있겠습니다만, 일단 밥부터 먹는 것.
소설만의 독자적인 영역을 찾으라면 영화나 만화 그리고 게임과 달리 아름답게 잘 짜인 문장을 많이 접할 수 있다는 특성보다는 다양한 실험과 상상력을 발휘하기 좋은 매체라는 특성에서 찾고 싶습니다.
제 목표는 역사에 남는 걸작을 쓰는 대작가가 아니라 언제까지고 즐겁게 글을 쓰는 생활형 작가입니다.
내가 어떤 경험을 하기를 원해서, 혹은 그저 하게 되어서 하는 것과 내가 더 좋은 작가가 되기 위한 발판으로 삼기 위해 어떤 경험을 찾아서 하는 것이 같은 경험이 될 수는 없습니다.
전자는 자연스러운 성찰로 이어지겠으나 후자는 기만적인 여가 생활에 그칠 위험이 크죠.
성장에 집착하지 않고서 어깨에 힘을 빼고 언젠가 더 나아지리라는 희망만 품고 하던 작업을 묵묵히 하는 것이 훨씬 효율이 좋은 방법인 셈입니다.
독서와 글쓰기는 사람이 혼자서 하는 일 중에서 제일 재미난 일들입니다. 독서와 글쓰기만큼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독해와 발화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제 지론으로는 그렇습니다.
근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인간은 언어로 사고합니다. 그리고 독서와 글쓰기는 이 언어를 다루는 일들입니다. 그러니 독서와 글쓰기는 가장 원초적인 즐거움을 주는 작업인 것이고,
가장 원초적인 즐거움이니만큼 제일 재미난 일들인 것이지요.
사람들의 정서가 달라진, 달라져야 하는 부분도 분명히 있고 그에 따라 작가가 자신의 사상을 작품에 담는 것만큼이나 세상의 변화를 주목하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작품이 나왔던, 또 다루고 있는 시대의 특성을 무시해서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저 역시 이 시대르 저만의 방식으로 기록하는 한 사람임도 분명합니다.
작업량이 많지 않아도 꾸준히 쓸 수 있다면 평균 일일 작업량의 부족함을 극복할 수 있고요.
직관은 이론을 발견하고 완성하며 이론은 직관을 정돈하고 확장해요. 창작에 있어 영감과 작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영감은 작법의 단초를 찾아내며 작법의 실질적인 활용으로 마무리됩니다.
작법은 영감을 다듬고 더욱더 참신한 영감을 찾도록 도와요. 직관과 이론 그리고 영감과 작법은 상호보완의 개념으로 보는 것이 옳습니다.
우리는 이야기를 통해 더 다채로운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가 태어나 살아가는 것이 목적이라면 그리고 보다 더 오래 더 강렬하게 살아가는 것이 목적이라면 이야기야말로 가장 간단히 우리의 목적을 잘 이뤄주는 도구이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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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맘 @gammam자연계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약육강식보다는 적자생존이 훨씬 더 적합해요. 약하고 강하고의 문제가 아닌, 적응했느냐 적응하지 못했느냐의 문제입니다.
목표를 달성해도 좋고 달성하지 못해도 좋습니다. 목표를 가짐으로써 작업을 하고 또 의욕을 낼 수 있다면 뭐든 의미가 있는 것이지요.
목표를 인식했고 납득할 정도로 시도했다면 그 자체로 충분합니다.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해서 얻을 이득이래봤자 별거 아닌 우월감이고, 받을 손해를 따져보면 영혼이 무너지는 열등감인데. 고작 주변의 작가 지망생들 사이에서 5분 정도 우월감을 느낄 일말의 가능성을 위해 5개월동안 열등감으로 몸부림칠 위험을 감수한다면 여러모로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도박 아닌가요? (그룹경쟁에 대해)
작가로서 성장하는 과정은 사람에 따라 그 양태가 천차만별입니다.
자기가 만족하고 납득할 순간이 지금 당장이 아니고 아주 먼 순간에 올지 모른다고 해서 아쉬울 필요도 없습니다. 그 순간이 영영 오지 못하더라도 계속해서 노력했던 시간이 즐겁다면 손해를 보는 일도 아니고요.
작업에 대해 알이 못했을 때, 그저 작가가 되고 싶다는 집착만 있던 시절은 그저 괴롭기만 했습니다.
내가 작업을 좋아하고 계속할 방법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이 더 도움이 된다.
재미만 있으면 그만이라는 이야기는 창작의 공정에서의 고민을 뭉개버립니다.
도입부에 독자들이 자연스레 그 세계 안에 녹아들 수 있도록 안내하는 듀토리얼의 역할마저 요구됩니다. 명확하고 또 간결하게 필요한 정보를 전달해야만 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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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맘 @gammam내용이 형식을 결정하고 형식이 내용을 결정합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을 뿐입니다. 내가 원하는 내용에 어울리는 매체와 그곳의 형식이 어떠한지, 내가 원하는 매체와 그곳의 형식에 어울리는 내용은 어떠한지 이를 고민해보는 것도 좋겠지요.
외부에서의 침입은 두 가지 방향으로 정리되죠. 타인을 내 안에 받아들이거나, 타인 안에 내가 들어가거나. 이는 사랑이기도 하고 식사이기도 하고 침략이기도 합니다.
캐릭터성은 그 인물 한 명에게 온전히 주어지는 것이 아닌, 다른 캐릭터들과의 관계망 속에서 완성이 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내가 이입한 대상이, 나에게 있어 소중한 존재가 부당한 이유에서 회복 불가능한 위협을 당할 때 우리는 더 이입하고 다채로운 감정을 느낍니다. 분노도 나고 공포도 차오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호러에서 다루는 갈등에 있어 당위적인 면, 윤리적인 면을 함께 고민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폭력은 긴장을 부릅니다. 그리고 긴장은 의외로 오래 유지되지 않는 상태입니다. 너무 비정하고 그저 잔인하기만 하면 그 긴장은 풀리고 웃음거리가 되어버립니다. 그 때문에 많은 호러 영화가 군데군데에 코미디를 넣어 긴장을 잠시 풀어주는 것은 차라리 선제적으로 긴정을 풀고 이완을 시켜서 이후 있을 폭력적인 장면의 긴장을 한껏 끌어올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스너프나 포르노 영사처럼 폭력을 반복하기만 해서야 긴장이 유지되지 않으니까요. 따라서 폭력에는 드라마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드라마를 위한 이입이 필요합니다.
인물에게 감정 이입할 장면을 주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으냐. 여러가지 답안이 있겠습니다만, 일단 밥부터 먹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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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맘 @gammam제 목표는 역사에 남는 걸작을 쓰는 대작가가 아니라 언제까지고 즐겁게 글을 쓰는 생활형 작가입니다.
내가 어떤 경험을 하기를 원해서, 혹은 그저 하게 되어서 하는 것과 내가 더 좋은 작가가 되기 위한 발판으로 삼기 위해 어떤 경험을 찾아서 하는 것이 같은 경험이 될 수는 없습니다.
전자는 자연스러운 성찰로 이어지겠으나 후자는 기만적인 여가 생활에 그칠 위험이 크죠.
성장에 집착하지 않고서 어깨에 힘을 빼고 언젠가 더 나아지리라는 희망만 품고 하던 작업을 묵묵히 하는 것이 훨씬 효율이 좋은 방법인 셈입니다.
독서와 글쓰기는 사람이 혼자서 하는 일 중에서 제일 재미난 일들입니다. 독서와 글쓰기만큼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독해와 발화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제 지론으로는 그렇습니다.
근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인간은 언어로 사고합니다. 그리고 독서와 글쓰기는 이 언어를 다루는 일들입니다. 그러니 독서와 글쓰기는 가장 원초적인 즐거움을 주는 작업인 것이고,
가장 원초적인 즐거움이니만큼 제일 재미난 일들인 것이지요.
사람들의 정서가 달라진, 달라져야 하는 부분도 분명히 있고 그에 따라 작가가 자신의 사상을 작품에 담는 것만큼이나 세상의 변화를 주목하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작품이 나왔던, 또 다루고 있는 시대의 특성을 무시해서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저 역시 이 시대르 저만의 방식으로 기록하는 한 사람임도 분명합니다.
작업량이 많지 않아도 꾸준히 쓸 수 있다면 평균 일일 작업량의 부족함을 극복할 수 있고요.
직관은 이론을 발견하고 완성하며 이론은 직관을 정돈하고 확장해요. 창작에 있어 영감과 작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영감은 작법의 단초를 찾아내며 작법의 실질적인 활용으로 마무리됩니다.
작법은 영감을 다듬고 더욱더 참신한 영감을 찾도록 도와요. 직관과 이론 그리고 영감과 작법은 상호보완의 개념으로 보는 것이 옳습니다.
우리는 이야기를 통해 더 다채로운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가 태어나 살아가는 것이 목적이라면 그리고 보다 더 오래 더 강렬하게 살아가는 것이 목적이라면 이야기야말로 가장 간단히 우리의 목적을 잘 이뤄주는 도구이지 않을까요?